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악바르 대제 (문단 편집) ===== 라지푸타나 정복 ===== 그렇게 델리를 중심으로 북인도 지방 대부분을 정복한 악바르의 다음 목표는 라지푸트인들이 살던 라지푸타나 지방이었다. 라지푸타나 지방은 현재 인도의 [[라자스탄]]에 대응하는 상당히 거대한 지방으로, 이 곳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기껏 정복해놓은 북인도 영토가 언제든지 측면에서 공격을 당할 수 있는 위협이 존재했다. 때문에 악바르는 북인도를 완벽히 손아귀에 넣기 위해선 반드시 라지푸타나를 정복해 후환을 없애야만 했다. 무굴 제국은 라지푸타나 지방의 수많은 라지푸트 소국들에게 사신을 보내 당근과 채찍을 곁들여 이들을 길들였다. 대부분의 라지푸트인들은 악바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항복을 선언했지만 오직 두 명의 군주만이 거부했다. 각자 메와르의 왕이던 우다이 싱과 말와르의 왕이던 찬드라센 라토르가 그 주인공이었는데, 특히 우다이 싱은 이전 [[바부르]]와 북인도의 패권을 놓고 격돌했던 라나 상가의 후손으로 라지푸트의 수많은 왕들 중 가장 서열이 높았다. 즉 우다이 싱을 굴복시키지 않고선 라지푸타나를 무굴 제국이 틀어쥐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악바르는 우다이 싱을 굴복시키기 위해 직접 나섰다. 우다이 싱이 다스리던 메와르의 수도는 요새도시 치토르였는데, [[아그라]]에서 구자라트로 향하는 최단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라지푸타나 지방의 핵심 거점이었기에 치토르 요새만큼은 반드시 함락해야만 했다. 악바르가 대군을 이끌고 메와르를 침공하자 우다이 싱은 자이말과 파타, 이 두 장군을 시켜 치토르 요새를 방비하게 하고 정작 자신은 메와르의 산골짝으로 도망쳤다. 치토르 요새는 4개월에 걸친 공성 끝에 함락당했고, 악바르는 치토르 내부에 남아있던 민간인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후대에 악바르가 지탄받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치토르 요새의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지만 악바르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에서 승리한 악바르는 아그라로 돌아와 승전식을 열었다. 치토르 요새를 버리고 도망간 우다이 싱은 다시는 예전만큼의 영향력을 되찾지 못했고 악바르도 더이상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우다이 싱의 후계자 프라타프 싱이 끈질기게 저항하긴 했지만 1576년 할디그하티 전투에서 대패하고 얌전히 쪼그라들어 산간 지방에 박혔다.] 악바르는 치토르 요새를 함락한 여세를 몰아 1568년에는 인도 최고의 요새라고 불리던 란탐보르 요새마저 함락했다. 당시 란탐보르 요새는 라지푸트인들이 소유한 요새들 중 가장 험준하고 성벽이 높아 인도 대륙 전역에서도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요새였는데 허무하게도 두 달도 안되어 함락당했다고 한다. 치토르 요새에 이어 마지막 방어선이던 란탐보르 요새마저 털리자 더이상 라지푸타나에서 악바르와 무굴 제국에 대항할만한 세력은 사라지다시피 했다. 모든 라지푸트 왕들이 무굴 제국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악바르는 라지푸타나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1569년 아그라에서 남서쪽으로 37km 떨어진 곳에 새로운 수도 '파테푸르 시크리'를 세웠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승리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로써 악바르의 라지푸타나 정복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